▶ 화제의 인물- ‘춤추는 스님’ 김묘선
세상에는 특별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래도 이런 사람은 처음이다. 영화 같은 삶, 혹은 드러매틱한 라이프라는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한 인생. 오랜 기자생활 동안 화려하게 멋있게 살아온 사람들을 숱하게 인터뷰했지만 이렇게 특별한 스토리를 가진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다.
일본 ‘대일사’주지, 공연 보고 반해 청혼
현해탄 넘은 구애 1년여 만에 결혼
한국 전통무용 소개로 ‘준문화재’지정
김묘선(51). 우선 이 여인을 무슨 직함으로 소개해야 될 지 조금 고민이 된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자면 그녀는 무용가다. 한국 전통무용가로서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 춤‘의 이수자이며 ‘준문화재’다. 준문화재란 머잖아 ‘인간문화재’가 될 것이 확실한, 대단한 실력자라는 뜻이다. 그녀는 또한 UCLA의 교환교수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한국 전통무용을 한 달에 한번 꼴로 강의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한국에 살지도, 미국에 살지도 않는다. 그녀는 일본에 살고 있으며, 놀랍게도 1,200년 역사를 가진 명찰 ‘대일사’의 주지스님이다.
2008년 12월19일 진언종 대각사의 주지 인증식을 가진 김묘선은 일본 전체를 통틀어 외국인으로 주지승이 된 첫 번째 인물이다. 진언종 대각사는 한국으로 치면 조계종과 같은 일본 불교계의 대표적인 종단. 그녀는 이 종단에서 외국인으로는 물론, 여성으로서도 처음으로 주지승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생활불교의 나라인 일본에는 절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누구나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면 승려가 될 수 있다. 또한 스님은 결혼할 수 있으며, 사찰의 모든 재산과 주지 자리가 자녀에게 세습된다).
한국의 혼이 담긴 승무와 살풀이를 멋지게 추던 여인이 도대체 왜, 어떻게, 일본 사찰의 주지스님이 되었을까? 수많은 ‘최초‘ 기록을 세우는 여인, NHK가 10년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로 그녀를 기록하고 있으며, 욘사마 못지않게 일본에서 인기 있는 화제의 여성, ‘춤추는 스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열 살 때부터 춤을 춘 김묘선은 인간문화재 우봉 이매방의 촉망받는 제자로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전통무용부문 금상, 서울전통예술경연대회 대통령상을 수상한 대단한 춤꾼이다. 추계예대 국악과와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20년 전 미국으로 건너와 UCLA 어학연수를 하면서 이매방 전통무용보급소 남가주 지부를 차리는 등 이곳서도 약 3년간 활동한 적이 있다.
인천에서 한창 활약하던 95년, 그녀의 무용단은 일본 시고쿠의 문화단체 초청으로 현지에서 공연을 가졌다.
무대에 오른 김묘선의 승무, 나를 듯이 휘어지고 감기우며 접어 뻗는 그녀의 춤사위에 평생을 독신 수도해 온 일본의 대승정이 무너졌다. 황진이와 지족 선사의 만남이 그랬을까? 그녀에게 한 눈에 반한 스님이 다짜고짜 청혼을 했다. 말도 안 통하는 일본 스님과 결혼하다니,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으나 그는 일 년 동안 현해탄을 오가며 열렬하게 구애했다.
당시 출강하던 연세대와 선화예고에서 전임 얘기도 있고, 인천시립무용단 자리 얘기도 오가던 때라 망설이던 김묘선에게 스님은 “장차 한국 정부가 당신을 모셔갈 정도로 유명한 무용수가 되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일사의 주지 오구리 고에이(대율흥영)는 유명한 스님이었다. 100일 금식기도를 성공했을 정도로 수련을 많이 쌓은 대승정이며 시고쿠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랬던 사람이 거의 환갑 나이에 한국의 무용가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그 반대가 어떠했을까.
1996년 3월, 결혼과 함께 일본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그녀는 매스컴을 탔고 유명해졌다.
‘시고쿠 춤의 여왕’ 욘사마 못잖은 인기
남편 유언대로 주지 올라 ‘외국인 여성 1호’
“아들에 물려주고 인간문화재 되는게 꿈”
대일사가 있는 시고쿠는 일본 열도를 이루는 4개 섬 중의 하나인 큰 섬으로, 이 섬에 있는 수천 개의 절 중에서 88개의 절이 유명한 순례코스로 지정돼 있다. 진언종을 세운 홍법대사가 순례하며 도를 닦았던 88개 사찰을 번호대로 돌며 참배하는 코스인데 일본인은 누구나 죽기 전에 꼭 한번 마치고 싶어 하는 순례여정이라고 한다. 대일사는 88개 코스의 13번째 절로, 순례객이 하루 수백명, 연간 수십만명 방문하며 절에서 숙박도 하는 큰 사찰이다.
김묘선은 시고쿠에서도 무용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죽을 각오로 일본어를 공부했고 완벽한 일본어로 지역 대학과 문화기관에서 한국 전통무용 강좌를 도맡으면서 얼마의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시고쿠의 춤의 여왕’으로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얼마 후 귀한 아들을 낳았고, 그는 결혼 전의 약속대로 아내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며 그녀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녀가 한국의 무용단들과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러다 얼마나 많은 공연을 했는지, 한국 문화재청은 2005년 해외에 사는 무용가로는 처음으로 ‘준문화재’로 지정했다. 한국이 모셔갈 정도로 유명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남편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화려하고 신나게 살던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2007년 4월, 그가 68세로 타계했을 때 아들 오구리 고모는 7세였다.
“처음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습니다. 워낙 큰 명찰이라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내게 쏟아지는 책임과 관심이 너무 무서워서 그냥 애 데리고 한국으로 가버리려고 했지요”
그때 일곱 살짜리 아들이 화를 내더란다. “아빠처럼 훌륭한 큰 스님이 되고 싶으니까 엄마가 날 그렇게 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쓰러지기 바로 전 그녀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당신도 스님 자격증 따놓으라”했던 말을 유언삼아 남편이 타계한 지 한달 만인 2007년 5월부터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아무도 스님 공부를 가르쳐 주지 않는 차별을 견디며, 아들에게 반야심경을 배우면서, 그해 12월 1차 스님시험에 합격했다. 스님 공부도 어렵지만 주지가 되기 위해선 100일간 끔찍한 수행과정을 거치고 공부도 엄청나게 해야 했다. 그녀는 매일 두 시간밖에 못 자고 새벽부터 냉수목욕을 하면서 450개나 되는 작법(손으로 하는 수행언어)을 다 외우고 두꺼운 책 한 권 분량의 깨알 같은 불경을 모두 외웠으며 2008년 5월 2차 주지시험에 합격했다. 다들 이삼년 걸리는 공부, 그래도 합격하기 힘들다는 주지 공부를 1년만에 마친 것이다.
“목숨 걸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에 결혼해서 마흔둘에 낳은 아들이 너무 귀해서요. 나는 나약한 여자일 뿐이지만 엄마이기 때문에 강해지더군요”
지금 풀러튼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유학중인 아들 오구리 고모는 10년 후 만 20세 법적 성인이 되면 스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때가 되면 대일사를 아들에게 맡기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추는 것이 무용가 김묘선의 꿈이다.
그리고 그녀는 곧 또 기록을 세우게 될 것이다. 해외에서 처음으로 ‘준문화재’로 지정받은 것처럼, 역시 해외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의 인간문화재로 지정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일본 사찰의 주지이면서도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이유, 바로 인간문화재가 되려는 그녀의 집념 때문이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설법 준비를 하고, 매일 법회를 열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상대해야 하는 주지스님 일은 어떨까? “승려는 사명이고 운명입니다.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되는 것이나, 하기 싫다고 안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보니 나의 길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만났을 때 김묘선은 ‘운명을 개척하는 여자’라고 생각됐다. 그러나 인터뷰를 끝냈을 때 그녀는 ‘운명을 지배하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숙희 기자>
남편 오구리 고에이와의 결혼사진.
대일사의 주지승이 된 무용가 김묘선. 일본불교 최초의 외국인 스님, 진언종 최초의 여자 주지스님, 시고쿠 섬의 영장 88개소에서 유일한 여자 주지스님이다.